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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간 생선 명태에 대한 추억

  • 2015.02.27(금) 08:20

▲ 삽화: 김용민 기자/kym5380@


한국인에게 명태는 친숙한 생선이다. 예전 우리 겨울 밥상에는 하루라도 명태가 빠지는 날이 드물었다. 동태찌개 아니면 북어포, 북어구이, 혹은 명란젓까지 고기로 채우지 못한 동물성 단백질을 명태가 보충했다. 

 

우리만큼 명태를 알뜰살뜰 다양하게 먹는 민족도 드물다. 몸통은 물론이고 껍질에서부터 아가미, 내장, 심지어 눈알까지 빼내어 요리했다. 명태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 것을 뿐만 아니라 생선살로는 별도로 전을 부쳤고 내장으로는 창란젓, 알은 명란젓, 아가미는 아가미 젓을 담갔다.

명태 껍질만 해도 국으로 끓이면 어글탕이 별미고 따로 무쳐서 껍질 무침이나 볶음, 혹은 묵을 쑤거나 쌈을 싸 먹고 명태 눈알은 초무침을 만든다. 내장을 빼내 젓갈을 담근 빈자리에는 소를 넣어 명태 순대를 만들었으니 조선시대 이래 명태로 만든 음식 종류가 모두 36가지를 넘는다.

명태는 식용 이외에도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다. 명태가 엄청 잡혔던 함경도에서는 명태로 등잔불을 밝혔기에 세상을 밝게 해 주는 생선이라는 뜻에서 명태(明太)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명태의 여러 어원설 중 하나지만 옛날 명태 기름으로 등잔불을 삼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껍질은 물건을 붙이는 접착제로 사용했고 음식을 먹다가 체했을 때는 명태 머리를 지져서 체한 것을 내리는 소화제로 사용했으며 명태로 짠 기름은 기가 허해진 사람이나 산후 복통에 먹었고 말린 명태인 북어는 피를 멈추는데 이용했으니 명태가 바로 약이었다.

명태를 이토록 다양하게 요리하고 여러 용도로 활용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명태가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명태가 얼마나 흔했는지 조선 말기 고종 때의 문인 이유원은 『임하필기』에 강원도 원산에서는 명태가 얼마나 많은지 마치 한강에 땔나무를 쌓아 놓은 것처럼 많아서 그 숫자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고 했을 정도다.

옛날에는 명태가 정말 흔했다. 너무 많이 잡히고 값이 싼 까닭에 깊은 산골짜기에 사는 노인과 아낙네,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북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명태를 아무나 먹는 물고기, 가난한 사람이 먹는 생선이라고 했다. 흔하디흔한 생선이었기에 남을 욕할 때도 명태가 빠지는 법이 드물다.

 

“명태 만지고 손 씻은 물로 사흘을 국 끓인다”는 속담이 있다. 생선 만진 손 씻은 물로 국을 끓였다니 굴비를 매달아 놓고 입맛만 다셨다는 자린고비보다 더 인색한 사람을 탓할 때 쓰는 말이다. “북어 한 마리 부조한 놈이 제사상 엎는다”고 하면 하찮은 것을 주고 지나치게 생색낸다는 말이 되겠고 “명태 한 마리 놓고 딴전 본다”는 속담은 엉뚱한 짓을 할 때 지청구 놓은 말이다. 속된 말로 쓸데없는 말을 할 때 “노가리 깐다”고 말하는 것도 명태가 한꺼번에 많은 새끼를 낳는 것에 빗대어 생긴 말이다. 노가리는 명태의 치어다. 그렇지 않아도 명태가 흔한데 거기에 새끼인 노가리까지 까대니 반가울 것도 없다.

이렇게 흔했던 명태를 지금은 우리 바다에서는 찾아보기조차 어렵게 됐다. 때문에 국산 명태를 되살리려고 명태를 잡아 신고하면 포상금까지 지급한다. 수정란 확보를 위해서다. 온난화와 함께 남획의 결과다. “있을 때 잘하자”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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