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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는 스토리다]① 창업주 서성환, 근현대사 격랑 속에서

  • 2015.09.10(목) 11:38

동백기름 팔던 어머니, 아들은 좋은 원료 찾아 180리길 달려
강제징병으로 삶과 죽음 경계까지 경험..'자유인' 가치 깨달아

▲ 경기도 오산 '아모레퍼시픽 아카이브'에 전시돼있는 한장의 가족사진. 양복을 입은 사람이 아모레를 세운 故 서성환 회장이다.

 

검은색 양복차림의 남자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2남4녀의 자식들. 아모레퍼시픽 오산공장에 마련된 '아모레퍼시픽 아카이브' 안에는 오래된 앨범 속에 고이 간직돼있을 법한 빛바랜 사진 한 장이 걸려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찍은 사진이다.

 

"창업자 고(故) 서성환 회장의 가족사진입니다. 부부 사이에 앉아있는 꼬마가 지금 아모레퍼시픽의 최고경영자(CEO)인 서경배 회장입니다."

아카이브 안내를 맡은 여직원의 설명이다. 나비넥타이를 맨 채 아버지 무릎 위에 고사리 손을 얹고 있는 사진 속 꼬마는 아버지의 회사를 글로벌 100대 혁신기업(포브스紙 선정, 28위)으로 키웠다. 서 회장은 지난 9일 기자들과 만나 "아모레는 올해로 70년의 역사를 가졌지만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아직 역사가 짧은 회사다. 전세계 고객을 기쁘게 하는 원대한 기업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 자전거로 달린 180리 길

▲ 故 윤독정(위) 여사와 그녀의 아들인 故 서성환(아래) 회장.

사실 아모레의 출발은 19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 회장의 할머니인 故 윤독정 씨가 개성 남문거리에서 시전(市廛) 상인들로부터 등잔기름, 머릿기름을 가져다 판 게 화장품과 연을 맺은 계기가 된다.

 

당시만 해도 머릿기름은 여성들의 필수품이었고, 이 가운데 윤 씨가 주로 취급한 동백기름은 값이 비싼 품목에 속했다. 비록 일제시대였지만 나라 안의 상권을 쥐락펴락했던 개성상인들이 있던 곳이라 동백기름의 수요가 많았다고 한다.

 

2년 뒤 윤 씨는 개성에 가게(훗날 '창성상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를 열고 머릿기름을 직접 만들어 팔았다.

서 회장의 아버지인 故 서성환 회장은 1939년, 그의 나이 16세 때 상급학교 진학을 접고 어머니의 가게를 돕기로 했다. 그는 좋은 원료를 구입하려고 자전거로 개성에서 서울 남대문시장까지 180리(45㎞) 길을 오고갔다. 당시엔 기차만큼은 아니어도 자전거도 귀한 운송수단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말기로 접어들었어도 창성상회는 비교적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 동백기름을 팔던 창성상회는 1943년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김재현백화점'(1941년 오픈)에 화장품 코너를 열었다.

◇ 日 패망직전 끌려간 전쟁터

시간을 되돌리면 아모레의 역사는 80년이 넘는다. 그럼에도 아모레가 70년 전인 1945년을 창립연도로 보는 건 故 서 회장이 식민지 백성으로 겪은 설움과도 무관치 않다. 그는 일제가 패망하던 해인 1945년 1월 만 20세의 나이로 강제징병돼 전쟁터로 끌려갔다. 같은해 8월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지만 중국에 있던 그는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항복문서를 접수한 뒤에야 풀려났다. 그때가 9월5일이다. 아모레는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정했다.

서경배 회장은 "선대 회장(아버지)은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전의 일은 진정한 창립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고 말했다. 강제로 끌려간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한 20대 청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 자유 깨달은 서성환 "해방이 시작"

故 서 회장의 일대기를 기록한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라는 평전을 보면,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 귀국했다. 징병에서 풀려난지 반년 가까이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해 혹독한 겨울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는 일본군에서 풀려날 때 배급받은 쌀을 팔아 염색약을 사고, 그런 다음 군복을 물들여 되파는 식으로 돈을 마련해 중국에서 끼니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 뒤의 일을 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해방 뒤 세상은 지원병이 아닌 징병을 다녀온 사람들에게도 부역 혐의를 씌우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가지 말아야지 왜 갔느냐'는 게 해방된 세상의 인심이었다. (중략) 과거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인들이 돌아와 '환향녀'가 아닌 '화냥년' 소리를 들었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중략) 그 뒤로도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적어도 2000년대 초까지는 자신들의 군대이력을 떳떳이 드러내놓고 말해서는 안되는 금기처럼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다."

서성환 이름 앞에 붙는 '아모레 창업주'라는 거창한 타이틀 뒤에는 근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어야했던 한 인간이 있었던 셈이다. 故 서 회장은 귀국 뒤 창성상회의 이름을 아모레의 전신인 '태평양상회'로 바꿨다. 이듬해(1947년)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 남창동으로 터전을 옮긴 故 서 회장 일가는 태평양상회 대신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지금의 아모레가 시작된 것이다. (다만 아모레는 태평양화학공업사의 창업시기를 해방을 맞은 1945년으로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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