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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는 스토리다]③ 1991년의 파업, 시련과 성장

  • 2015.09.14(월) 14:36

부메랑 돌아온 사업다각화, 노조파업까지 '첩첩산중'
"본업으로 돌아가자" 증권·야구단·패션 등 과감한 정리
고속성장 발판 마련, IMF 위기때 히트작 내며 승승장구

지금은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기업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 아모레퍼시픽이지만 1990년대 초만해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 태평양화학(現 아모레퍼시픽)노동조합에 따르면 10년을 근무한 아모레 생산직 여사원의 기본급은 27만원으로 정부가 추정한 대도시 4인 가족 최저생계비(32만원)에 못미쳤다. 직원들은 잔업과 철야를 반복했고 이직률도 높았다.

급기야 1991년 5월13일 저녁,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한 아모레 노조원 가운데 500여명이 용산 본사를 점거했다. 25일간에 걸친 이 점거농성은 6월6일 새벽 4시 공권력 투입으로 끝났다. 당시 동원된 경찰병력은 2000여명. 경찰은 소방차 매트리스, 고가사다리를 설치한 뒤 최루탄을 쏘며 10층 농성장으로 진입, 477명을 연행해 6명을 구속했다.

 

▲ 1991년 태평양화학노동조합의 파업 사태를 다룬 신문기사들. 서경배 회장은 파업 당시를 아모레 70년 역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로 기억했다.


◇ "가장 어려웠다" 1991년 5월의 기억

그해 4월 명지대 강경대 군이 시위도중 진압경찰에게 맞아 숨진 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정부는 6월초 한국외국어대에서 발생한 정원식 총리서리 집단폭행 사건을 계기로 노동계와 학생운동권, 재야에 대한 강경대응으로 선회한다. 당시 정부가 노동계 중 첫 본보기로 삼은 곳이 용산 본사에서 점거농성을 하던 아모레 노조였다.

서경배 아모레 회장은 지금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한다. 1991년 파업 당시 서 회장은 기획조정실 상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당시 거의 사업이 망할 뻔 했다"면서 "화장품 시장이 개방되고 민주화 등 경제사회적으로 여러 변화 움직임이 있었던 시기였는데 대응이 미숙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파업 전부터 아모레에는 경고등이 들어왔다. 1986년 화장품 수입이 전면 자유화되면서 외국산 화장품이 물밀듯 들어왔고, 1990년대 초반엔 그간 아모레의 고속성장을 이끌었던 방문판매도 흔들렸다. 특히 1970~1980년대 금융, 전자, 금속 등 전공분야와 동떨어진 분야까지 사업을 다각화한 후폭풍이 몰아쳤다. 현재 아모레의 계열사는 12개지만, 당시엔 25개에 달했다. 아모레는 부실 계열사들의 채무보증으로 자금압박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파업이었기에 충격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 고뇌 뒤에 내린 결단

회사문을 닫을지 모를 위기를 겪으면서 아모레 창업주 故 서성환 회장은 '우리는 왜 세상에 존재하는가?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다고 한다. '다 버리더라도 마지막 하나 지켜야할 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화장품'이었다. 아모레는 이를 '소명'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존재이유이자 지향점을 '아름다움(美)'에서 찾았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그해 겨울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한 태평양증권(現 SK증권)을 SK그룹에 매각(1991년)한 것을 시작으로 야구단 태평양 돌핀스(1995년), 태평양패션(1995년), 태평양여자농구단(1997년) 등을 정리했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노사관계도 불과 3년만에 모범적인 노사협력기업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을 정도로 바뀌었다.

남들보다 먼저 몸집을 가볍게 하며 자신의 강점에 주력했던 아모레는 IMF 외환위기로 진로·대농·해태·대우·동아건설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질 때 헤라와 아이오페, 설화수 등의 히트작을 내며 승승장구했다. 서 회장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1997년 110억원이었던 아모레의 당기순이익은 2001년 1000억원을 넘었다.

 

 

◇ "잘하는구먼!" 아버지의 칭찬 

자녀들에 대한 칭찬에 인색했던 故 서 회장은 이 때만큼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라는 책을 보면 故 서 회장은 아모레의 이익이 1000억원을 넘었다는 당시 서경배 사장의 보고를 받고는 "잘하는구먼!"이라는 한마디를 던졌다고 한다.

아들인 서 회장은 "90년대 말에 있었던 어려움을 잘 극복한 후 선대 회장(故 서성환 회장)께서 좋아하셨던 모습은 내 개인적으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었다"며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

 

故 서 회장은 1991년 노조파업 이후 폐암수술을 받았다.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도 그 즈음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2003년 1월 한국 화장품업계의 거목인 서성환 회장은 숨을 거둔다. 故 서 회장은 ▲남다른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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