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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는 스토리다]④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 2015.09.16(수) 16:15

新시장 노리는 서경배 회장 "겉만 보지 말라"
"중국서 성공한 것도 장기간 투자 끝에 가능"
쿠션 제품처럼 브랜드 뒷받침하는 기술력 필수

 

"중동의 여성들은 히잡(머리를 가리는 스카프) 등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이런 문화를 가진 곳의 화장품 시장이 유망합니까?"

지난 9일 경기도 오산 아모레퍼시픽 뷰티사업장에서 열린 '창립 70주년 기념 미디어 간담회'에서 서경배 회장은 기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서 회장이 내년 두바이를 시작으로 중동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한 뒤 나온 질문이다.

서 회장은 편견을 깨면 새로운 시장을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말씀하신 대로 중동 여성들은 히잡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닙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히잡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런 복장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 알고, 그 실생활은 보지 않습니다. 얼굴을 가리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중동 여성들은 더 자기표현을 하고 싶어 합니다."

영국의 시장조사기관인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색조화장품 시장규모는 3억7000만달러로 전년대비 약 13% 증가했다. 니캅(눈을 제외하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스카프)을 쓴 여성들이 많아 색조화장품을 덜 쓸 것 같지만, 오히려 니캅 때문에 화려하고 정교한 눈화장이 발달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는 정갈한 몸가짐을 뜻하는 향수와 헤어제품이 인기다. UAE 소비자가 미용제품에 지출하는 돈은 1인당 170달러(연간)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많다. 해방 직후와 6·25전쟁 당시 국내 화장품시장이 특수를 누린 것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는 시대와 공간을 가리지 않는다. 

◇ 뚜벅뚜벅 개척한 중국시장..이번엔 중동·중남미로

서 회장은 중동뿐 아니라 내후년(2017년)에는 중남미 진출을 계획 중이다. 2020년 매출 12조원의 절반을 해외에서 달성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지난해 아모레 매출은 4조7000억원, 해외매출 비중은 18%였다. 아모레가 추구하는 '아시안 뷰티'가 중동과 중남미 국가에서도 통할지 섣불리 장담하긴 어렵다. 문화가 다르고 하다못해 기후와 피부색도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아모레는 1990년 화장품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에 현지법인을 세우고 '순정', '리리코스' 등의 화장품을 선보였지만 쓴맛을 본 경험이 있다. 공들여 만든 제품이 싸구려 취급을 받으며 진열대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광경을 본 뒤 모든 제품을 수거해 폐기처분한 당사자가 지금의 서 회장이다.

▲ 中 백화점 화장품 판매순위(자료:코트라)

다만 '우보천리(牛步千里)'의 길을 걸었던 중국과 미국에서의 사례는 앞으로 아모레 행보에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

아모레는 로레알, 시세이도, P&G 등 쟁쟁한 글로벌기업들보다 늦게, 그것도 당시 외국계기업들이 변방으로 여기던 중국 동북3성의 선양을 첫 진출지(1993년)로 삼아 중국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무명의 설움 속에 뚜벅뚜벅 10년을 걸어 상하이로 나왔고(2002년 상하이 공장 준공), 다시 10년 뒤 3400여개의 제조업체들이 각축을 벌이는 중국에서 손꼽히는 시장지위를 확보했다.

 

코트라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중국 백화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화장품 5위가 아모레 제품이다. 아모레는 미국의 P&G(6위), 프랑스의 샤넬(7위)을 제쳤다.

미국에서는 뉴욕 5번가에 위치한 고급백화점 버그도프굿맨에 입점(2003년)한지 10년이 넘어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브랜드를 앞세우는 화장품산업의 특성상 하나의 브랜드가 현지에 뿌리내리기까지는 세심한 전략과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 아모레는 중국과 미국에서 첫 술에 배부른 전략보다는 한땀한땀 핵심도시와 유통채널을 장악하는 수순을 밟았다.

송광수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아모레가 중국시장의 덕을 봤지만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라며 "장기간의 투자와 이를 감내한 오너의 결단이 지금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외면받던 쿠션, 1.2초에 한개씩 팔리기까지

화장품 브랜드는 소비자들 사이에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제품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모래 위의 누각과 같다. 아모레의 제품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게 쿠션이다. 지난해 아모레 쿠션제품 판매량은 2600만개로 1.2초당 하나꼴로 팔렸다.

아모레가 2008년 처음 선보인 쿠션제품은 `화장품을 주차도장 찍듯 간편하게 사용할 순 없을까` 하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선크림과 파운데이션 등을 발포 우레탄 스펀지에 안정적으로 가두는 게 핵심기술이다. 쉽게 말해 스펀지에 화장품을 넣어 만든 제품이다. 당시엔 이런 제품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디어는 참신했지만 이를 제품화하고 판매로 연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모레 연구원들은 가장 적합한 스펀지를 찾아 청계천 세운상가 등을 뒤졌다. 개발이 끝난 뒤에도 생소한 제품인 탓에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전통적인 판매채널에서 외면받던 쿠션제품은 홈쇼핑에서 대박을 낸 뒤에야 입소문을 타며 불티나게 팔렸다.

경쟁사들도 비슷한 제품을 내놓았지만 아모레의 기술력과 품질을 따라잡기에는 힘에 부쳤다. 쿠션제품은 원료를 섞을 때 정해진 온도와 속도를 정확히 지켜야하고, 스펀지에 내용물을 넣을 때도 그 양(量)과 누르는 세기에 따라 품질이 달라진다. 아모레는 생산라인마다 샘플을 수거해 제품의 사용감과 색상, 포장상태를 점검하는데 미세한 오류라도 발견되면 곧바로 전수검사를 실시하는 등 깐깐하게 품질을 관리한다.

아모레는 지난해 7월 쿠션제품을 연구하는 별도의 연구소(C-Lab)를 열었다. 올해 6월에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디올과 쿠션기술 개발을 위한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아모레 관계자는 "디올측에서 먼저 요청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1959년 프랑스의 코티사(社)로부터 기술을 전수받는 입장이었던 회사가 이젠 프랑스에 한 수 가르쳐주는 위치에 올랐다는 얘기다.

 

▲ 여성들의 미용법을 바꾼 아모레퍼시픽의 쿠션제품들.


◇ "빠른 것만이 혁신은 아니다"

쿠션제품은 빠르고 즉각적인 성과로 이어지는 것만 혁신으로 여기는 풍토에 반기를 들었다. 시간과 비용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소비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일이다. 임계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소비자도 체감하기 어려운 '새로운 가치'에 주목해 이를 준비하는 것도 큰 틀에서 혁신으로 볼 수 있다. 서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생산부문 직원들도 처음에는 이 제품을 만드는 것에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섰기에 오늘날 쿠션이 있다고 봅니다. 혁신이라는 것은 남이 잘하는 것을 잘 흡수하는 빠른 혁신도 있고, 때로는 더딜지 몰라도 '슬로 러닝(slow running·천천히 달리는 것)'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이것이 되겠느냐'고 생각했던 쿠션이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성공한 것처럼 말입니다."

한방원료로 화장품을 만들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30여년 뒤 설화수로 이어졌듯 아모레의 혁신은 속도전보다는 지구전(持久戰)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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