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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에서 꿈을 꾼다는 것

  • 2015.10.20(화) 09:38

[인사이드 아웃] 조정화 J코칭연구소 대표

"요즘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른다며? 헬(Hell)이 지옥이라는 뜻 아니냐. 젊은 사람들이 정말 살기 힘든 세상인가 보다"

 

인터넷 검색을 못 하시는 어머니조차 이 해괴한 단어를 아신다니, 올해 최고의 유행어는 역시 '헬조선'이구나 생각했다. 그럼 언제는 우리나라가 또 '헤븐'(heaven·천국)이었나 생각해보면 그런 적도 없다. 청년 실업, 경기 둔화, 사회 양극화 문제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확실히 요즘 청년들의 날 선 정서는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를 드러내는 대부분의 지표들이 나빠졌다. 한국은 수년 째 OECD 국가 자살률 1위, 출산율 최하위 국가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는 최근 5년간의 국내 자살자 숫자가 같은 기간 전 세계 주요 전쟁 사망자수 보다 2∼5배 많다고 발표했다. 불행한 국민이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며 마음의 전쟁을 겪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헬조선'은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지식인이나 학자들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분노와 허탈함을 넘어선 젊은 세대가 자조하다 못해 스스로 만들어 낸 말이다. 나는 이 점에 눈길이 갔다. 드디어 우리가 개인 밖의 사회, 보이지 않는 구조와 시스템에 눈을 뜨게 된 것인가 생각했던 것이다. 그 동안에는 세상이 청년들에게 계속 이름표를 붙였다. 이태백, 88만원 세대, N포 세대(모든 걸 다 포기한 세대), 심지어 달관세대라는 말까지 별 도움도 없이 동정표만 날려댔다.

 

'너희 정말 살기 힘들지? 그렇잖아. 맞잖아' 아무리 찔러대도 20대들은 숨죽인 채 그저 자신의 노력 부족만 탓할 뿐이었다. 그게 필자를 포함한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다른 이를 누르고 올라서는 것만 배우며 익힌 생존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조금씩 문제의 외연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아우성이 나라 지도자들에겐 아직 대수롭지 않은 듯하다. 안되면 나라 탓하는 단순한 투정으로 보이는 것일까. 혹은 이 땅이 자신들에겐 헤븐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만한 조롱과 비난에도 별 반응이 없고, 아무리 '노오력' 해도 안 된다는 것만 거듭 확인한 청년들은 조용히 자기 삶에서 포기할 것만 늘려가고 있다.

 

다같이 겪는 문제를 공론화하고 함께 해결하는 훈련이 모든 교육과정에서 너무 부족했다. 청년들이 찾은 대안이란 겨우 탈조선(이민) 정도다. 도망친 곳에 어찌 낙원이 있을 수 있을까.

 

▲ 취업박람회장을 가득 메운 청년 구직행렬

 

이제 청년들은 자기계발서도 읽지 않는다. '더 노오오력 해라', '성공을 향해 미쳐 달리라'는 식의 말이 공허하다 못해 비수처럼 가슴에 박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점을 가니 '~할 용기'라는 제목의 책들이 평대를 도배하고 있었다. 미움 받을 용기, 나답게 살아갈 용기, 행복해질 용기, 상처받을 용기, 늙어갈 용기 등 헬조선에서 살아가려니 사소한 일에도 보통 이상의 용기가 필요해진 모양이다.

 

무언가를 위해 더 노력하라는 말이 이처럼 조심스러운 때가 없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노력은 필요하다. 다만 그것은 예전과는 다른 노력이다. 취업, 학점, 스펙에 목숨 거는 노력은 아마 앞으로도 별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 남들 다 하는 데서는 뭘 해도 탈출구를 찾기 힘들다.

 

영화에 나오는 지옥의 특징이 뭔가. 사람들이 불 웅덩이에서 뒤엉켜 서로 나오려고 발버둥치다 아무도 못 빠져 나오는 곳이 지옥이다. 그냥 바닥을 짚고 유유히 걸어나오면 된다. 이곳 밖은 어디인지 몰라도 내 마음이 이끄는 것을 나침반 삼아 나가야 한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할 지 모르겠다.

 

금수저, 은수저 힘 빠지는 수저 탓도 그만하자. 이 세상에 물질이 금, 은, 동, 흙 밖에 없단 말인가. 나는 내가 가진 물성으로 살아나가면 된다. 이런 삶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다. 아마 지금까지 해온 노력보다 몇 십 배는 더 힘들 것이다. 외롭고 낯설고 끝을 알 수 없는 길. 하지만 각자 자기 가치대로 조금씩 다르게 움직여 가다 보면 기존 질서에 균열이 가고 헬조선에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노력은 사회를 향한 날 선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민을 꿈꾸고, 정치를 혐오하는 청년들을 누가 가장 반가워하겠는가. 헬조선에서 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분노가 오를 대로 오른 청년들이 과연 다음 선거에는 어느 정도의 투표율을 보여줄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우리의 꿈은 자기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이냐와 더불어 이 세상이 얼마나 더 나아질 수 있는지와 항상 결부되어 있어야 한다. 천국까지 갈 필요도 없다. 사람 사는 세상, 그냥 인간계로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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