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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story] 모두를 울린 국세청의 칼끝

  • 2015.10.23(금) 16:10

국세청 모형 '부실과세' 오명..혈세로 소송비용 부담
소송 장기화로 기업 리스크 지속..로펌도 '좌불안석'

국세청과 대기업 100여곳이 지급보증 세금 문제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과세 규모만 수천억원에 달하는데요. 이렇게 많은 기업들이 똑같은 이슈를 놓고, 국세청에게 불만을 제기한 것도 드문 경우입니다.

 

당초 국세청에게 유리해보였던 과세 논리가 최근 대기업들의 우세로 역전됐는데요.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불편해졌습니다. 국세청과 대기업, 국민 모두를 불행으로 이끈 지급보증 과세의 뒷 얘기를 전합니다.

 

▲ 삽화: 김용민 기자/kym5380@

 

#1. 대기업 정조준한 국세청

 

2012년 4월 16일 국세청은 '해외자회사 지급보증수수료 정상가격 결정모형을 공개'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합니다. 대기업들이 해외 자회사로부터 지급보증을 서주고 받는 수수료가 너무 적으니까, 국세청이 다시 계산해서 수수료를 덜 낸 부분에 세금을 물리겠다는 겁니다.

 

국세청 입장에선 해외에 진출한 대기업들에게 세금을 추징할 수 있는 획기적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모형을 개발하기 위해 한국기업데이터에 외주용역을 주고, 국세청 내부에서도 상당히 많은 인력들이 머리를 맞댔다고 합니다.

 

모형이 공개된 이후 국세청은 대기업 100여곳을 상대로 과세에 나섰는데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과세 논리를 접한 대기업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죠. 결국 기업들은 대형 로펌(법무법인)과 회계법인들을 통해 국세청과의 과세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2. 한 방에 뒤집힌 판결

 

대기업들은 납세자 권리구제 기관인 조세심판원의 문을 두드렸지만, 국세청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심판원에선 지급보증 과세와 관련해 단 한 건도 인용(납세자 승소)을 해주지 않았죠. 국세청의 과세 모형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1일 서울행정법원은 기아자동차와 LG전자, 효성, 한국전력공사, 동국제강(유니온스틸), 현대엔지니어링, LG화학, LG이노텍, 롯데쇼핑, 태광산업 등 10개 기업이 제기한 소송에서 국세청이 부과한 세금을 취소하라고 판결했습니다.

 

23일에는 대상과 OCI,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현대글로비스, 한화케미칼 등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굴지의 대기업들도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데요. 이 또한 대부분 대기업들이 승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입니다.

 

 

#3. 국세청의 뜨거운 눈물

 

법원이 지급보증 과세모형에 대해 '위법'이라는 해석을 내놓자 국세청도 난처해졌습니다. 애꿎은 기업들만 잡았다는 '부실 과세'의 오명을 뒤집어쓴 겁니다. 실제로 법정에서 판결 결과를 지켜본 국세청 직원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국세청이 3년 전 야심차게 시작한 모형은 폐기처분 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은 직원들의 고생도 모두 허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행정력과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됩니다.

 

이제 국세청은 기업들이 로펌을 선임할 때 낸 소송 비용까지 모두 부담해야 합니다. 설익은 모형으로 수천억원의 세금을 걷으려다 막대한 소송 비용만 날리게 된 거죠. 이 비용들은 모두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됩니다. 국민들도 간접적인 피해자가 된 셈이죠.

 

#4. 국민과 기업 모두 피해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기업들입니다. 세금 추징을 당한 100여곳의 대기업들은 과세의 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승소 판결이 나더라도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억울하게 추징된 세금을 완전히 씻어내려면 더 오래 기다려야합니다. 국세청이 항소에 나설 계획이기 때문에 고등법원과 대법원까지 판결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데요. 아무리 로펌에서 대응해준다지만, 세무 리스크는 계속 안고 가야겠죠.

 

#5. 로펌도 웃지 못하는 이유

 

이번 과세분쟁 과정에서 유일하게 득을 본 곳은 바로 로펌들입니다. 국세청과 대기업들이 싸우는 사이 소송에 대한 수임료를 가져가게 되는데요. 최초 수임은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시작했지만, 법무법인 율촌이 가장 많은 소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21일 첫 인용 판결이 나온 기업 10곳 중 8곳의 대리인도 율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율촌에서도 마음 놓고 웃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올해 초에 조세팀장으로 합류한 국세청 출신 정 모 세무사 때문입니다. 세무대 1기 출신인 그는 2012년 당시 국세청의 지급보증 수수료 과세모형을 개발한 담당 과장이었습니다. 시험 출제자가 과외선생님이 되어 수험생들의 만점을 도와준 격입니다.

 

율촌 측에서는 정 세무사가 과세모형을 만든 사실을 모르고 영입했다는 입장인데요. 정 세무사에게도 물어봤더니 "소송에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지급보증 모형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하필 몸 담고 있는 로펌에서 인용 결정을 받아낸 터라 당혹스럽다고 합니다.

 

3년 전에 나온 국세청의 모형 과세는 곳곳에 상처만 남겼습니다. 앞으로도 판결이 계속되는 만큼, 지급보증 세금을 둘러싼 논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을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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