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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웃을때 피해자는 울고 또 울었다

  • 2016.04.25(월) 13:26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 인터뷰]
평범한 직장인 삶 아들 죽음 후 멀어져
"진정한 사과 받아낼 때까지 싸우겠다"

▲22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정문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들이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김성은 기자]

 

"내 손으로 독을 사서 내 자식에게 들이마시게 했다는 죄책감, 이게 가장 힘듭니다."

지난 22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만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 김덕종(40)씨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숨을 골랐다. 전날 밤 제대로 잠을 못잤다는 그는 이날 환경보건시민센터를 떠나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으로 시위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에 앞서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가 지난 21일 공식 입장을 밝혔지만, 이를 피해자에 대한 사과로 해석하기엔 힘들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피해자 입장을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 "옥시, 할일 다한 것처럼…"

   

김씨는 서울중앙지검을 향해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인터뷰를 통해, 지난 2009년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당시 5살이었던 아들을 잃었다고 털어놨다. 아들이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후로부터 6년 후인 2015년이었다. 경북 구미에서 소방관으로 일하는 김씨는 그 후 한주에 한 번씩 서울로 올라와 또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가습기 살균제 피해대책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와 관련해 옥시가 지난 21일 발표한 공식 입장에 대해서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피해자들을 위한 인도적 기금이라며 환경부에 기부금을 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사람을 죽인 기업이 제대로 된 사과는 커녕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는 기부금을 정부에 내고는 할 일을 다한 것처럼 말한다"고 지적했다.

 

◇ 英본사 "올해 출발 좋다"..韓 피해자는 아랑곳 안해

 

옥시가 이메일 사과문을 발표한 지난주는 영국 본사 레킷벤키저가 '한 해의 좋은 시작'(Good Start to the Year)이라는 제목의 1분기 보고서를 발표한 시기이기도 했다. 지난 18일 레킷벤키저가 밝힌 올해 1분기 매출은 23억300만파운드(3조7800억원)로 전년동기대비 약 4% 늘었다. 이 보고서에서 라케쉬 카푸어 레킷벤키저 최고경영자(CEO)는 "어려운 시장 상황에도 불구하고 올해 좋은 출발을 했다"며 "우리의 소비자 건강 브랜드 실적은 다시한번 예상치를 상회했다"고 말했다.

 

영국 레킷베킨저가 실적호조에 만족감을 나타내는 동안 한국에선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김씨는 그간 만났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실상에 대해 풀어놨다. 폐가 굳어 평생 산소호흡기를 달고 숨 쉬거나, 폐이식 수술 후 매일 면역억제제를 한 움큼씩 복용해야 하는 환자들이다. 폐섬유화증 진단을 받은 한 40대 남성은 증상이 심해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10년간 투병하다 결국 지난해 사망하기도 했다.

 

◇ 옥시, 벼랑 끝 피해자들에 합의 종용

또 다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인 안성우(39)씨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 때문에 우리나라 폐이식 수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예전에는 1년에 한 건 있을까 말까 했던 폐이식 수술이 수년 전부터 십여 건 넘게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이들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수술이나 치료에 드는 돈을 자비로 먼저 지급한 뒤 정부에 영수증을 제출해야만 비용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일례로 1억원 이상의 비용이 드는 폐이식 수술도 환자가 개인적으로 수술비를 마련해야만 수술을 받을 수 있다. 안씨는 "이만한 돈이 없으면 수술을 받지 못해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도 피해자들에게 지원되지 않는다. 일례로 올해 6살인 한 피해자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자 기도에 구멍을 뚫어 산소통 등 각종 장비를 연결했지만, 장비에 따른 비용은 '비급여' 항목이라 고스란히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때문에 피해자들은 2~3년 이상 걸리는 소송에서 정신적으로 지친 데다 생활고에 쫓겨 끝내 옥시와의 합의문에 도장을 찍은 이들도 많다고 한다.

    

◇ 180도 달라진 삶.."또 이런 일 벌어질수도"

 

 

안씨는 1년 전 일을 그만두고 고향인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매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 대책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전에는 어떤 일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회상에 잠긴 듯 잠시 앞을 응시하다 대답했다.

"회사원이었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둘째를 임신한 아내가 세퓨의 가습기 살균제로 사망한 지난 2011년, 안씨는 5살배기 아들과 둘만 남았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의 삶은 그 후 180도 달라졌다. 그가 서울로 올라오며 부모에게 맡긴 아들은 올해로 9살이 됐다. 안씨는 떨어져 있어 얼굴 볼일이 드문 아들이 이젠 아빠를 찾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1시간여가 흘러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들은 팻말을 들고 차 밖으로 나갔다. 얼굴이 검게 그을린 이들은 서울중앙지검 정문 앞에서 멈췄다. 팻말을 든 두 사람은 그늘도 없는 햇볕 아래에 섰다.

이들은 "단지 돈 때문이라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사람을 한 번 죽인 업체가 또다시 이런 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 말란 법이 어딨겠나"라며 "진정한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계속해서 싸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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