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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스의 낙마와 '디플레이션 파멸'

  • 2013.09.16(월) 09:50

지난 2000년대 초, 부동산 거품이 막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을 때다. 당시 필자는 거시 경제정책의 실무를 맡은 간부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공무원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아주 명쾌했다. "내가 경기도 용인에 사는데, 우리 집값은 하나도 안 올랐다. 국지적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공무원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총괄 지휘하는 자리로까지 영진(榮進)을 거듭했고,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집이 있는 용인을 '버블 세븐'에 포함하는데 깊이 간여했다.

 

역시 2000년대 초 1차 부동산 파동 때의 일이다.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부동산 가격 등 불균형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에는 적극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뒤로 집값이 계속 뛰는데도 우리의 중앙은행은 '적극' 대응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나중에 "손발이 꽁꽁 묶였다"고 토로했다가, "20년 넘게 살고 있는 우리 집은 값이 하나도 안 올랐다"고도 항변했다. 우리 중앙은행의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제발 좀 금리 올려달라"는 민초들의 청원이 도배를 했다.

 

국민들이 중앙은행에 '파티장의 술통을 치워달라'고 청원을 하는 이 기괴한 현상은 과거에 그것도 한국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오는 18일 금융정책위원회를 열어 부동산 시장의 거품 여부를 진단하고 대응책을 모색할 예정이다. 영국 여당의 고위 정치인으로서 현재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장관을 맡은 인사까지 나설 정도로 여론이 들끓자 중앙은행이 마지못해 시늉을 하는 것이다.

 

영란은행은 그동안 수차 반복해서 "오는 2016년까지는 금리를 인상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왔다. 이른바 '제로금리 포워드 가이던스' 정책이다. 그러나 금융시장에서는 씨가 먹히지 않고 있다. 물가와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내년 말쯤에는 금리를 올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전망이 금융 가격에 반영돼 있다.

 

대서양 건너 미국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절대적으로 유력한 차기 연방준비제도 의장 후보로 꼽혔던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이 우리 시각으로 16일 새벽 돌연 레이스를 포기했다. 서머스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친조카이자 또 다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외조카이며, 하버드대 총재를 지낸 유력 경제학자이자 민주당의 정책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확고하게 밀고 있던 사실상의 낙점자였다.

 

서머스를 낙마시킨 것은 야당인 공화당이 아니었다. 서머스는 여당인 민주당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접어야 했다.

 

미국 여당이 대통령의 뜻에 정면으로 맞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핵심은 서머스가 과거 금융규제를 완화하는 데 앞장서 온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다시는 거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거듭 주장하며 여당의 반감을 무마하려 했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다.

 

거품에 관한 정치적 논란은 미국이 영국보다 더욱 광범위하다. 당장 미국 정부는 의회가 정해 놓은 부채한도에 막혀 더는 빚을 낼 수 없는 사정에까지 도달해 있다. 의회가 한도를 늘려주지 않으면 당장 다음 달부터는 이자를 갚을 돈마저 남지 않을 정도로 금고가 비어 있다. 그러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70%는 부채한도 상향을 반대하고 있으며, 심지어 정부가 부도를 내더라도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강경한 목소리가 55%에 달한다고 한다.

 

적어도 지난 2000년 기술주 거품이 붕괴한 이후로 우리는 교과서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균형과 안정을 덕목으로 하는 중앙은행들이 거품 붕괴의 충격을 모면하기 위해 새로운 거품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 왔다. 지난주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고백한 것처럼 “거품과 붕괴는 우리 삶의 일상이 돼버렸다.”

 

그 결과 국민들의 반감은 이제 정치적 여론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여당 인사들이 제동을 걸고 나설 정도이니 '샤워실의 바보들'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 환경에 직면하게 됐다. 그럼 그들은 앞으로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마크 파버는 'The Gloom, Boom & Doom Report(침울, 호황 그리고 파멸)'라는 서비스를 창간한 분석가이자 트레이더다. 그가 발간하는 리포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조울증에 걸린 중앙은행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 중 한 사람이다.

 

지난달의 어느 인터뷰에서 파버는 "당장 내일이 될지, 아니면 10년 뒤가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 디플레이션 파멸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예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 배경으로 파버는 '사회적 문제'를 거론했다. 대표적인 곳으로 홍콩과 싱가포르를 꼽았다. 그곳들을 포함한 아시아는 지난 40년간 고도의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그 결과 지금은 "믿기지 않을 만큼 부유한 소수의 집안이 엄청난 부동산을 독점하고 있고, 그들을 위해 국민들은 아주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고 있으며, 국민들의 실질 소득은 감소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최근 영국과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변화는 파버가 지적한 '사회적 문제'가 아시아뿐만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래리 서머스 연준 의장 후보의 낙마 소식이 전해지자 월스트리트에서는 "주식과 채권시장에 호재가 될 것"이라는 반응이 우세하다. 그 동안 서머스가 마치 통화 긴축론을 주창하는, 양적완화에 반대하는 매파적 인물인 것처럼 포장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머스의 낙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보다 큰 그림에서도 조망할 필요가 있다.

 

천하의 미국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지각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용암의 기운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파버가 말하는 '디플레이션 파멸'은 아마도 그 뜨거운 용암에 깜짝 놀란 샤워실의 바보들이 느닷없이 찬물을 틀어대는 순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지난 1930년대 초에 그랬던 것처럼.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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