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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기부' 날개를 달다

  • 2017.05.23(화) 08:00

[커버스토리]'180억 기부에 140억 세금폭탄' 논란 일단락

대학생들에게 건넨 장학금이 거액의 세금으로 되돌아온 '수원교차로' 사건을 아십니까. 자수성가 사업가인 황필상씨가 자신이 설립한 수원교차로 주식을 장학재단에 기부했다가 세금을 추징당한 일인데요. 황씨와 국세청이 10년 가까이 법정소송을 벌인 끝에 최근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선의의 기부에 대해 국세청의 과세 처분이 너무 가혹했다는 결론입니다. 이제 착한 기부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 받게 되는 걸까요. 이번 판결이 주는 의미를 짚어봤습니다. [편집자]

▲ 삽화/변혜준 기자 jjun009@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황필상(70)씨는 자신처럼 어렵게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모교인 아주대에 자신이 설립한 생활정보지 '수원교차로'의 주식을 직접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 측은 이왕이면 공익법인을 통해 주식을 받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고, 황씨는 대학에 장학재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황씨는 2002년 10월, 현금 1억2465만원에 수원교차로 명의의 출연금 1억7535만원을 보태 장학재단을 설립했습니다. 4개월 후 그가 보유한 수원교차로 주식 7만2000주와 6촌 동생이 보유한 주식 3만6000주 등 총 9만8000주를 장학재단에 추가로 기부했는데요. 두 사람이 기부한 주식은 수원교차로 전체 주식의 90%를 차지했고 평가액만 180억원에 달했죠. 
 
훈훈한 미담사례로 회자되던 그의 기부는 5년 후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통해 '무상 증여'로 딱지를 붙이면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9월부터 두 달간 세무조사에 나선 수원세무서는 장학재단에 140억원의 증여세를 부과했고, 황씨는 재단이 세금을 못 낼 경우 대신 납부해야 하는 '연대납세' 의무까지 떠안게 됐죠. 이 때부터 황씨는 기나긴 법정 소송에 돌입합니다.

▲ 그래픽/변혜준 기자 jjun009@
 
◇ 착한 기부, 법원도 갈팡질팡
 
황씨가 거액의 증여세를 추징당한 이유는 상속증여세법의 공익재단 관련 규정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세법에는 기업의 대주주가 공익재단에 주식을 기부할 때 전체 발행 주식의 5%를 초과한 부분에 대해서는 최고 50%까지 증여세를 과세하도록 돼 있습니다. 재벌기업 오너가 공익재단을 통해 2세에게 주식을 증여하는 편법을 막기 위해 만든 규정인데요. 황씨가 이 규정에 딱 걸린 겁니다. 주식이 아니라 현금을 공익재단에 기부한 경우에는 세법에 따라 증여세 비과세 혜택을 받습니다.
 
법원도 일찌감치 황씨가 선의의 기부자였다고 판단했지만 법에 명시된 대로 과세한 처분을 물리기도 어려웠죠. 사정이 딱하다는 이유로 봐줬다간 과세 공정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죠. 
 
법원은 2010년 7월 첫 판결을 내렸는데요. 당시 수원지방법원은 황씨에게 부과한 세금을 취소하라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국세청이 판결에 항소했고 이듬해 서울고등법원은 과세 처분에 문제가 없다며 사건을 원점으로 되돌려놨습니다. 이후 6년이 흐른 2017년 4월에야 대법원이 '파기 환송' 판결을 내리면서 황씨의 선의가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제 사건은 다시 고등법원에서 파기환송된 부분에 대해 심리를 거친 후 종결될 예정인데요. 고법 판결을 통해 국세청이 실제로 세금을 얼마나 돌려줄지 여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 기부 살리는 세법 개정 필요
 
조세전문가들은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정부가 기부 관련 세법을 획기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황씨의 대법원 소송을 대리한 소순무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국세청은 법에 따라 과세했지만 결과적으로 황씨와 그의 가족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줬다"며 "더 이상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과감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해 한국조세재정연구원과 한국세법학회가 개최한 세미나에서는 공익법인이 기업 주식을 출연 받을 경우 증여세 비과세 한도를 전체 주식의 5%에서 20%로 올리자는 의견이 대세였습니다. 예를 들어 삼성복지재단이 삼성전자의 주식 5%를 출연받으면 증여세 비과세 혜택이 주어지지만 6%를 받을 경우 증여세를 내야 하는데요. 세법 개정을 통해 삼성전자 주식 20%를 출연 받더라도 증여세를 물리지 말자는 의견입니다. 
 
하지만 공익법인에 대한 주식 증여세 비과세 한도를 올리면 오히려 재벌에게 편법증여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만큼 철저한 사후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구상수 법무법인 지평 공인회계사는 "기부를 활성화하려면 장기적으로 공익법인에 대한 세법상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며 "선의의 기부에는 혜택을 많이 주는 대신 재벌의 편법증여에는 강력한 사후 제재를 가하는 투트랙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공익재단 기부에 대한 세제혜택이 제대로 안착하려면 선의의 기부자를 확실하게 가려내는 것이 관건인데요. 기부자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공익재단인 경우나 대기업 주식을 기부하는 경우에는 세제 혜택을 배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반면 특정인이 통제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공익재단에 대한 기부에는 세금 인센티브를 충분히 열어주자는 대안도 나옵니다.
 
기획재정부도 대법원 판결 이후 공익법인 기부에 대한 세금에 걸림돌이 없는지 검토하고 있는데, 오는 7월 발표할 세법개정안에 세부 방안이 담길 전망입니다. 기재부 관계자는 "기부문화 활성화를 유도하면서도 편법증여 탈루 가능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살펴볼 것"이라며 "제도 개선이 실제 기부자 확산 효과로 나타날 수 있도록 고민해보겠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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