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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의결권]⑤슈퍼맨(?)을 반대한다!

  • 2018.04.24(화) 11:10

<총수일가 사내이사 선임 안건 분석>
5개사 이상 겸임에는 반대표 행사
신동빈·조현준·정몽규·채형석 등 해당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면서 혹은 불안한 노후의 대비책으로 '투잡(two job)'을 생각하는 월급쟁이가 있다면 다니는 회사의 취업규칙을 먼저 살펴봐야한다. 투잡 금지는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웬만한 기업들은 직원이 회사의 허락없이 영리를 목적으로 다른 일에 종사하는 걸 금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낮에는 기자, 밤에는 주식투자 컨설팅을 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 기자가 쓴 기사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투잡 하다가 걸리면 '원잡(one job)'마저 잃을 수 있다. 근태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헌법에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는데 남는 시간에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뭔 상관이냐는 불만이 나올 수 있다. 밤낮 없이 일하다가 몸 상할까봐 회사가 걱정해주는 것이라고, 직장을 못구한 청년실업자가 100만명이 넘는 시대에 다른 사람에게 일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라고 위안을 삼자. 그게 속이 덜 쓰리다.

월급쟁이가 투잡을 하려면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져야 한다. 하지만 오너 일가는 예외다. 업무시간에 쓰리잡, 포잡, 파이브잡 등 여러개의 일을 해도 회사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물벼락 갑질' 사건으로 공분을 일으킨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만 해도 진에어 부사장, 칼호텔네트워크 대표 등 그룹 내에서 총 7개의 임원 직책을 갖고 있었다. 일주일에 하루씩 근무하는 식이었을까. 어쨌든 회사는 문제삼지 않았다.

 

경영수업 과정에서 여러 계열사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진그룹, 엄밀히는 조양호 회장이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 타이틀도 없는 사람에게 회사의 민감한 정보를 제공할 순 없는 일 아닌가. 그는 땅콩회항 사건을 일으킨 장녀 조현아 씨를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게 한 뒤 다시 복귀시키는 등 임원 자리를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오너 일가의 겸임을 삐딱하게 바라본다. 지난달 23일 조 회장이 진에어 사내이사로 선임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대표를 던진 곳이 국민연금이다. 조 회장은 이미 한진칼, 대한항공, ㈜한진, 정석기업 등 6곳에서 사내이사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지침에는 '과도한 겸임으로 충실한 의무수행이 어려운 자'에 대해선 이사선임시 반대할 수 있도록 해놨다. 몇개까지를 과도한 겸임으로 보는지는 나와있지 않지만 통상 5개 이상이면 과도한 범주에 넣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의 장남인 채형석 총괄부회장이 그런 사례다. AK홀딩스·애경화학·애경유지공업 등 5개사의 임원을 겸임하다가 국민연금의 반대에 부딪쳤다.

 

농심의 신춘호 회장은 4개 회사의 임원을 겸임하는데 반대가 없었던 반면 아들인 신동원 부회장은 7개 회사 임원을 겸임해 국민연금의 반대 리스트에 올랐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과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각각 6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10개를 겸임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은 모두 국민연금의 반대표를 받았다.

 

상법상 사외이사는 최대 2개사까지 겸임할 수 있다. 사내이사에는 이런 규정이 없다. 오너 일가가 문어발 식으로 자리를 꿰차고 있어도 이를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0대 중반 나이에 9곳의 사내이사를 맡는 특별한 케이스(KG케미칼)가 나오는 것도 이래서 가능했다. 흙수저들 사이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금수저라서 일어난다.

그렇다고 겸임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다. 법적인 책임은 지지 않고 뒤에서 황제경영을 하는 것보다 떳떳하게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책임경영을 하는 게 더 낫다는 논리다.

실제 의결권 자문기관 사이에서도 겸임 조항에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선 곤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연구위원은 "상근 여부, 적정한 보수지급 여부를 세밀히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이 연구소는 신 회장이 롯데쇼핑의 사내이사로 재선임되는 것에 찬성을 권고하는 의견을 냈다.

슈퍼맨을 용납하지 않는 국민연금과 내가 슈퍼맨인데 어쩔거야라고 생각하는 오너 사이의 줄다리기는 언제쯤 끝이 날까. 중요한 것은 투잡을 생각하는 월급쟁이는 슈퍼맨이 아니라는 점이다.

 

슈퍼맨의 자격(또는 슈퍼맨 지명권, 곧 인사권)은 서글프게도 오너에게만 주어진다. 올해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반대로 사내이사에서 낙마한 오너는 한명도 없다. 주주가치를 훼손한 전례가 있다며 반대했어도 무용지물이었다. 국민연금은 오너 앞에서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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