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한국의 독일, 한국의 그리스

  • 2013.11.13(수) 11:25

지난달 말 발간된 반기 외환정책 보고서에서 미국 재무부는 독일의 빈약한 내수(內需)와 지나친 수출의존 정책이 유로존과 세계 경제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이례적으로 강한 톤으로 비난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지난 7일 유럽중앙은행(ECB)은 전격적으로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치인 0.25%로 낮춘 ECB는 "더 내릴 수 있다"고까지 예고했다. 금리인하를 통해 독일은 물론이고 빈사상태에 빠져 있는 남유럽의 내수 역시도 좀 더 진작될 것이다. 그러나 유로존의 금리인하는 동시에 유로화에 하락압력을 가하면서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ECB의 금리인하가 단행된 지 며칠 뒤인 지난 12일,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리서치부문 대표인 아담 포슨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다섯 가지 항목을 들면서 독일을 자근자근 공격했다.

 

"1) 독일은 자신들의 생산성 향상에 버금가는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지불하지 않고 있으며(임금인상을 통한 내수확대 요구),

 

2) 공공부문이든 민간부문이든 독일은 투자를 하지 않고 있으며,

 

3) 이를 통해 독일은 저임금 경쟁력을 향유하고 있으며,

 

4) 이웃 유로존 국가들의 빈약한 경제 덕분에 발생한 유로화 약세로 독일은 부당한 보조금을 누림으로써 이웃 유로존 국가는 물론이고 전세계를 착취하고 있으며,

 

5) 전세계가 실업에 시달리고 있는 와중에 독일이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 노력하는 것은 전세계에 디플레이션을 수출하고 있다"고 포슨은 주장했다.

 

피터슨연구소는 미국 여당인 민주당의 싱크탱크 격으로, 포슨의 비난은 ECB의 완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만이 여전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포슨의 비난이 불을 뿜은 것과 거의 같은 시각에 독일의 한 일간지는 외르그 아스무센 ECB 집행이사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아스무센은 독일 재무차관 출신으로 ECB의 정책방향 설정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아스무센은 인터뷰에서 "기준 금리를 0.25%로 인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금리는 더 내릴 여지가 있으며, 이 외에도 ECB에 예치돼 있는 은행들의 초과유동성에 대해 마이너스 금리를 물린다든가, 지급준비율 자체를 폐지하는 방안도 실행 가능하다"고 말했다. 더욱 강력한 통화부양정책을 가동해 유로존의 디플레이션 위험을 퇴치하겠다는 의미다.

 

그는 지난달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이 0.7%로까지 떨어진 것을 지적하면서 물가상승률이 3.3%로 뛰어 오른 경우와 똑같은 정책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물가가 목표 기준선인 2.0% 아래쪽으로 1.3%포인트나 벗어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독일 출신의 ECB 임원이 강도 높은 통화완화정책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미국 정부가 독일을 대놓고 비난한 것 이상으로 매우 이례적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미국 재무부와 피터슨연구소를 만족시킬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피터슨의 포슨 대표는 이날 인터뷰에서 독일에 대해 남유럽에 대한 부채탕감과 과감한 국내투자 및 임금인상까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그 동안 ECB의 통화완화정책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 입장을 고수해 왔다. 남유럽이 빈사상태이긴 하지만 자신들은 비교적 호경기를 누려왔으며, 남유럽과 달리 자신들은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등의 자산가격 인플레이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디플레이션에 빠져 있는 그리스라든가,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기 직전에 있는 이탈리아 및 스페인에게 ECB의 통화정책은 이번 금리인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긴축적이다. 회원국들 사이의 양극화가 극대화되면서 통화정책을 둘러싼 갈등도 커지고 있다. 미국과 같은 연방제 국가라면 독일이 남유럽의 재정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역내 불균형이 조정되겠지만, 화폐만을 통합해 놓은 유로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ECB의 전격적인 금리인하와 추가 인하 예고는 미국 재무부의 비난과는 무관한 결정일 수 있다. 오히려 점증하고 있는 디플레이션 위험에 대응한 독립적인 정책대응의 신호일 가능성이 높다. 물가가 이런 식으로 떨어지다가는 남유럽의 국가채무 상환 능력이 다시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인플레이션에 극도로 민감한 독일이 자국의 인플레이션 위험을 무릅쓰고 통화부양책에 동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지난달 말 보고서에서 미 재무부는 한국에 대해서도 외환시장 개입을 비난하며 수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과감한 정책 도입을 "강력히 촉구"했다. 보고서는 "독일과 대만의 경상수지 흑자가 조정되지 않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는 흑자가 오히려 더 불어났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의 강력한 내수부양 압력에 직면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 역시 유로존과 똑같이 0.7%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역시 유로존과 마찬가지의 통화부양책이 제공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유로존과 똑같이 우리나라에도 독일이 있고 그리스가 있다. 일부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의 실적을 구가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대부분은 빈사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기술과 품질에서 국제적인 우위를 갖고 있는 일부 대기업들은 떨어지는 환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쟁력이 있겠지만, 여타 기업들에게는 현 환율수준이 지나치게 긴축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독일처럼 우리나라는 과도한 가계부채와 높은 부동산 가격 때문에 고심 중이고, 그리스처럼 우리나라는 핵심 연령층(20~30대)의 취업난과 소득 악화, 이에 따른 내수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수출을 늘리고 수입수요를 억제하는 독일과 유로존의 경상흑자 확대 정책은 어찌 보면 그들이 안고 있는 부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선택일 수 있다. 그리고 금리를 인하하는 정책은 경상흑자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디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는 보완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독일과 남유럽의 불균형을 해결할 수 없으며, 국제적인 비난과 압력을 피하기도 어렵다. 이는 유로존처럼 극도로 양극화돼 있는 우리의 경제구조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은 독일과 한국 등에 의해 발생하는 세계적 불균형을 문제삼고 있지만, 우리와 유로존이 진정 우려해야 할 것은 자국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극심한 불균형이다. 국제적 압력에 의해 우리 역시도 내수확대 정책이 불가피해 진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 내부의 그리스가 스스로의 힘으로 불균형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투자정책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naver daum
SNS 로그인
naver
facebook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