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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 혁명은 왜 반갑지 않은가

  • 2013.11.25(월) 10:31

5년전의 글로벌 금융위기와 그 이후 계속되고 있는 저성장이 과도한 부채 탓이라고 진단하는 데에는 이견이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이달 초 IMF에서 화제의 강연을 행한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그는 올해 한동안 가장 유력한 연방준비제도 의장 후보로 꼽혔었다)이나 그의 강연을 격찬한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그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의 생각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어쨌든 이 빚을 해결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해법이 있다. 소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거나, 부채가 폭발적으로 감소하거나. 소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위해서는 생산성 혁명이, 부채가 폭발적으로 감소하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이 필요하다.

 

서머스와 크루그먼은 지금의 위기가 총수요의 부족 탓으로 보면서 이를 획기적으로 끌어 올리면 소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플레이션도 발생하기에 부채문제도 해결된다고 보는 듯하다. 따라서 이들의 견해는 부채를 일으켜 부채를 해결하자는 주장인데, 이 자리에서는 일단 논외로 하고  생산성 혁명에 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달 초 글로벌모니터가 개최한 <글로벌 마켓 토크쇼>에서 패널로 참가한 김일구 씨티은행 리서치 담당 부장은 생산성 혁명이 위기를 해결하기 시작할 것으로 봤다.

 

"모든 사람이 달라 붙어서 하루에 텔레비전 한 대를 만들다가 이제는 한 사람이 백대를 만든다. 그러면 우리는 물질적으로 훨씬 풍족해지고 경제는 성장한다. 물량만으로 경제를 보는데, 생산성으로 봐야 한다.

 

2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전쟁으로 공장을 부숴서 그렇게 됐다고도 볼 수 있으나 기존의 공장들도 다 갈아 엎었다. 왜냐하면 2차대전 중 생산성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새로운 공장을 짓는 게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김일구 부장의 생각대로 정말 세계경제가 미국의 셰일가스를 계기로 생산성 혁명을 맞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필자는 아직 반신반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생산성 혁명이 빚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데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생산성 혁명이 발생하면 마치 인구 붐이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의 잠재 생산능력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는 단지 공급측면 뿐 아니라 수요측면에도 강력하게 긍정적인 충격을 가하게 된다. 생산성 혁명은 가격의 하락을 의미하기 때문에 경제주체의 실질 구매력을 확대시켜 새로운 수요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성 혁명의 이익을 기대한 기업들의 투자가 활기를 띠면서 고용과 총수요를 끌어 올리는 선순환을 이룬다.

 

문제는 이러한 도식이 단기적으로, 길게는 중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기 십상이란 데 있다.

 

예를 들어, 위에 언급된 생산성 혁명은 100대의 TV를 생산하는데 투입되는 노동량을 하루 1만명에서 1명으로 감소시킨다. 그리고 임금 코스트 감소에 따르는 이익은 일차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에게 돌아가고, 다음으로는 소비자들에게 파급된다.

 

가격하락 효과로 텔레비전 수요가 1만대로 100배 증가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TV생산 노동자의 수는 100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9900명은 단기적으로 직장과 소득을 상실하게 된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TV 생산라인 혁명으로 발생한 새로운 생산과 새로운 산업에 투입되겠지만 현실 경제에서는 이들 모두의 소득이 '당장' 보전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만 생산성 혁명인 것이다.

 

한 분야에서 발생한 생산성 혁명은 다른 분야로 계속 파급되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고용과 경제 볼륨이 전반적으로 증가하게 되지만, 여기에는 이렇게 물리적 시차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즉, 생산성 혁명은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닥치게 되지만, 분배구조가 이 과실을 모든 생산주체들에게 즉각 배분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단기, 중기적으로는 고용 없는 성장과 불평등을 야기하게 된다.

 

이상적으로는, 텔레비전 생산라인의 혁명은 1만명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이 1만분의 1로 감소하고 여가가 1만배 증가하고 그러면서도 소득의 변화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자본가의 생산성 증대 유인을 억압할 것이기에 불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경제 전 분야의 생산성이 동시에 증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경쟁적인 노동시장에서 기존 노동자들이 혁명의 과실을 모두 차지할 수는 없는 게 현실적이다.

 

세계화와 국제분업이 심화된 오늘날에는 이러한 생산성 혁명의 고통이 더욱 커지게 된다.

 

중국 등 이머징 국가들의 산업화는 세계경제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끌어 올렸다. 저가의 노동력이 일거에 공급되는 생산인구의 붐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기적, 중기적으로는 선진국의 고용기반을 극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신흥국 개발을 주도한 선진국 자본가들은 큰 이익을 얻었지만, 이 이익이 선진국 노동자들에게까지 배분, 파급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일자리를 잃은 선진국 노동자들은 이머징 국가의 산업화 및 직간접 수요증가에 관련된 보다 부가가치 높은 산업으로 흡수돼 나가고는 있다. 그러나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지, 이 것이 결국 충격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을 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단일 경제권 내부가 아닌 외부 경제권에서의 분업 형태로 발생한 생산성 혁명은 파급효과가 상당부분 단절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운송과 통신의 혁명을 통해 인류가 거리와 시간의 제약을 극적으로 단축시켰다고는 하지만,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시간 및 거리의 비용'은 완전히 극복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머징의 생산성 혁명 효과는 우선적으로 이머징 내부로 파급되며, 선진국 고용시장의 고통은 더 길어지는 것이다.

 

선진 경제권에서 발생한 생산성 충격은 결국 '부채의 문제'로 귀결됐다. 약화된 고용기반은 총수요의 약화를 낳았고, 이는 더 강한 재정정책을 요구하게 됐다. 즉, 선진국 정부의 부채가 증가하게 됐다. 일자리와 소득기반이 약화된 선진국 노동자들은 기존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빚을 늘려야만 했다. 즉, 선진국 가계의 부채도 함께 증가하게 됐다. 정부와 가계의 부채를 지원하기 위해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완화적 통화정책에 몰입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결국 선진국들의 부채는 붕괴하고 말았다.

 

따라서 선진국들이 인플레이션이 아닌 방법으로 부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서의 생산성 혁명'이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이 고용시장에 또 한번의 역설적 충격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 과실이 가계와 정부부채의 해결로 신속히 파급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분배구조의 정비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 과정이 자본가들의 생산성 혁신 유인을 저해하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선진국들이 보다 손쉬운 선택 즉, 자국 내 생산성 혁명의 과실을 독점하려는 경향을 보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여타 국가들에게 자신들의 독점적 생산성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이 자신들의 절대우위 영역인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압력을 강화할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 만약 미국이 정말 셰일가스를 통해 생산성 혁명을 이끌어낸다면 에너지와 관련된 다양한 게임의 룰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려 들 수 있다.

 

따라서 이 충격을 견뎌내려면 우리 역시 생산성 혁명이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이 아마 여성 노동력을 인위적으로 끌어내거나 출산율을 끌어 올리려는 노력보다 상대적으로 더 손쉽고 현실적일 것이다. 생산성 혁명으로 일자리가 늘어나고 소득이 증가하면 시키지 않아도 더 많은 노동력이 나타날 것이고 아이도 많이 낳을 것이니 그러하다. 정부의 역할은 생산성 혁명의 유인구조와 그 과실의 분배구조를 정비하는데 집중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노력은 순차적일 수 있는데, 그 불가피성을 설득하는 게 정부와 정치의 역할이자 역량이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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