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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 일까

  • 2013.04.06(토) 15:17

데자뷰는 5년전과 맞닿아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2개월째에 접어들던 2008년 4월말. 언론과 금융시장의 관심은 온통 '열석발
언권(列席發言權)'에 쏠려 있었다. 열석발언권이란 말 그대로 회의에 참석해 발언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 회의는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를 말하고, 발언권은 당시 기획재정부 1차관이던 최중경씨가 갖고 있었다.
 
정부가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이 권리는 한은법에 명시돼 있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 훼손에 대한 우려로 10년 가까이 사문화돼 왔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후 이 조항을 꺼내든 근본적 배경은 '747(성장률 7%, 1인당 소득 4만달러, 7대 경제대국)' 공약에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불거지면서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새 정부로서는 '경제 대통령'의 대표적 공약을 출범 첫해부터 포기할 순 없었다. 대선 캠프에서 747의 밑그림을 그렸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그해 성장률 목표치를 '6% 내외'라고 보고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내놓은 성장률 전망(4.8%)에 비해 대폭 상향된 수치였다.
 
◇ 747 공약한 정부..금리인하 노골적 압박
 
국내외 경제여건을 감안할 때 이같은 성장률이 무리라는 건 불보듯 뻔했지만 정부는 고집을 부렸다. 고환율 정책으로 대기업들의 수출을 지원하고, 금리인하로 내수를 부양시켜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대통령이 나라 경제를 살릴 대책을 주문하자 강 장관은 한은을 상대로 노골적인 금리인하 압박에 나선다. 금통위가 금리를 낮추지 않으면 거부권(재의요구권)까지 행사할 태세였다.
 
이명박 정부 1기 경제팀의 주축이었던 강만수-최중경 라인의 고환율·저금리 소신은 철석같았다. 문제는 고환율-저금리가 인플레이션 유발 요인이라는 점. 설립 목적 자체가 '물가안정'인 한은으로서는 금리인하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 정부가 선제적 조치로 들고 나온 게 열석발언권 카드다. 한은이 성장기조를 저해하는 금리결정을 하지 않도록 정부측이 금통위 회의에 참석해 미리 침을 놓겠다는 의도였다. 통화정책의 독립성 침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원자재값 상승으로 물가가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성장에 목맨 정부와 물가안정을 책임진 한은과의 마찰은 계속됐고 열석발언권은 결국 2010년 1월에 부활해 한동안 시행됐다.  
 
성장과 물가를 둘러싼 정부와 중앙은행간 갈등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다. 지난 5일 김중수 한은 총재는 청와대 서별관 회의에 불참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서별관 회의는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한은 총재 등 경제팀 수뇌들이 모여 경제금융 현안과 상황을 점검하는 자리. 당초 참석이 예정돼 있던 김 총재가 회의에 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자 돌출 행동의 이유와 의도를 놓고 분분한 해석이 제기됐다.
 
◇ 김 총재의 돌출 행동..회의 불참 배경은
 
김 총재가 당정청의 고강도 금리인하 압박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회의 참석을 거부한 것인지, 모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불참이라는 모양새를 갖춘 것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김 총재가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져 탈출구가 필요했다는 정황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동안 당과 정부, 청와대는 한은에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가 포문을 열었고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나라경제가 활력을 잃어 최대 20조원의 추경(추가경정예산)까지 짜려는 판에 한은도 금리를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청구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졌다.
 
5년전과 비교해 접근 방식이 달라졌지만 '경제 살리자는데 왜 말 안듣냐'며 정부가 한은을 독촉하는 모양새는 똑같다. 이명박 정부는 전(前) 정부가 내놓은 성장률 전망보다 훨씬 높은 목표치를 설정해놓고 한은을 닦달했고, 박근혜 정부는 전 정부가 제시한 성장률 전망 3.0%를 2.3%로 대폭 낮추며 금리인하를 압박했다.
 
일각에서 '좀 심하지 않느냐'는 눈총이 나올 즈음 서별관 회의 소식이 언론에 보도됐다. 예정대로 한은 총재가 회의에 참석하고 다음주 금통위에서 금리를 내리면 영락없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된다. '허수아비 금통위'나 '통화정책 독립성 훼손'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 총재는 '내가 왜 들러리 서주고 욕은 욕대로 먹어야 하느냐'는 심정이었을 수 있다. 김 총재가 당정청의 압박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회의에 안 갔다면 다음주 금통위의 결론은 '예고된 금리인하'가 아닐 지도 모른다. 불참 소식이 전해진 후 채권시장에서 금리하락세가 잠시 주춤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 명분 쌓기용?..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인가
 
한편에선 모종의 시나리오를 상정한 기획성 불참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권 차원'에서 이뤄진 압박 강도를 감안할 때 김 총재 고민은 깊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명박 정부 사람이다. 전 정권에서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대사를 거쳐 2010년 3월에 한은 총재로 중용됐다.
 
4년 임기가 법으로 보장돼 1년 더 재임할 수 있지만 정권의 협조 요청을 대놓고 거부했다간 총재 자리는 정치적 위협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1993년 3월, 김영삼 정부 초기의 대규모 경기부양책과 관련, 인위적 금리인하에 반대 논리를 펼치던 조순 총재는 문민정부 출범후 한달이 못돼 전격 경질됐다. 당시 그의 임기는 3년이나 남아있었다.    
 
다음주 금통위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김 총재 입장에서는 독립적으로 통화정책방향을 결정했다는 명분이 절실했다. 청와대 회의 불참은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위해 그가 어떤 형태로든 액션을 취했다는 증거다. 금통위가 금리를 동결한다면 명분을 살릴 수 있고, 금리를 내리더라도 총재가 외압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모양새는 갖출 수 있게 된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독자적 판단이었는지, 다른 플레이어들의 양해 아래 이뤄진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의 행동이 오롯이 통화정책 독립성이란 명분을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남는다. 3년전 총재 취임 당시 그는 "한은도 정부"라는 소신을 밝혀 독립성 논란을 자초했고 이후에도 정부 정책과의 협조·조화를 강조해왔다.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통화정책을 위해 정부와 각을 세우고 일전(一戰)을 불사(不辭)하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시장과 세인의 관심이 집중될 금통위 회의는 오는 11일 열린다. 김 총재의 회의 불참이 '짜고 치는 고스톱'에 대한 엄중한 항의였는지, 예상 시나리오에 따른 기획 이벤트였는지는 금통위 결과와 이후 총재 기자회견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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