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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끄덕였으니 움직일 것이라고요?

  • 2014.07.20(일) 14:38

강원국의 '직장인의 말하기·글쓰기'(4)
소통에 관한 회장님의 치명적인 착각

오늘 회의에서도 회장이 사장들을 엄청 깼다. 정교한 논리와 적절한 사례, 감성을 자극하는 고성과 육두문자, 그리고 현란한 제스처까지. 본인이 말하면서도 놀라는 눈치다.

 

내 안에 이런 생각들이 어디 숨어 있었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말빨’이 붙는 거야. 흐뭇하다. 속이 다 후련하다. 사장들도 열심히 받아 적는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 연발이다. 

과연 사장들은 회장의 말에 감복했을까.

머리를 끄덕이고 감동 어린 눈동자로 쳐다봤으니 공감했을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반감만 쌓였다. 오늘 또 한 번의 푸닥거리를 무사히 넘겼다고 안도하는 정도랄까?

회장이 직원들의 표정을 지배할 수는 있지만 생각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혹여 생각을 지배했다 하더라도 마음까지 지배할 수 있어야 진정한 승복이 가능하다.

요즘 유행하는 ‘갑을 관계’로 말하자면 이렇다. 의사 결정이나 통상의 업무 처리에서는 회장이 ‘갑’이고, 직원이 ‘을’이다. 그러나 말과 글을 통해 직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직원이 ‘갑’이다. 회장은 철저히 ‘을’이다. 회장의 말에 설득 당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권은 듣는 사람에게 있으니까.

회장은 왜 말을 하고 글을 쓰는가?

직원들을 감동시키려고? 논쟁에서 이기려고? 아니다.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무엇을 움직이려고?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실행하게 하는 것, 이것이 회장이 말을 하고 글을 쓰는 본질적인 이유다.

런던의 애덤 스미스 연구소장 매슨 피리(Madsen Pirie)이 쓴 「미시정치」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상(ideology)에서 이겼다고 사건(event)까지 이기는 것은 아니다.’ 경영은 사건이다. 사상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상대방을 인정해야 한다. 직원들은 같잖은 상대가 아니다. 굴복의 대상도 아니다. 대화의 상대이다. 항복을 기대해선 안 된다. 설사 항복을 받은들 너덜너덜해지고 의기소침한 직원을 어디에 쓸 것인가.

둘째, 나도 설득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설득당하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이자 진정한 용기이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설득당하지 않고, 상대방만 설득하겠다는 것은 아집이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을 것이라는 판단을 깔고 얘기해서는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최대한 설득당해 봐야겠다, 나도 좀 직원들에게 혼나보자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적 신뢰다.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평소 존경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상사가 아무리 ‘지당하신 말씀’으로 설득을 한들 그것이 귀에 들어오든가. 속만 부글부글 끓지 않든가. 아리스토텔레스도 ‘설득을 위해서는 에토스(Ethos, 인간적 신뢰), 파토스(Pathos, 정서적 호소), 로고스(Logos, 논리적 설명)가 필요한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내 맘 같지 않다. 상사이기 때문에 같은 척 할뿐이다. 결국 평소에 언행일치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설득의 기술이란 없다.

한 사람이 깊고 어두운 동굴 안에 갇혀 있다.
쇠사슬에 꽁꽁 묶여 깜깜한 벽만 바라볼 수 있다. 등 뒤에 켜진 촛불은 벽에 자신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그림자가 그림자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것이 실제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회사라는 조직, 특히 그 안에서 최고 위치에 있는 회장에게 회사는 깊고 캄캄한 동굴과도 같다. 외롭고 고독하다. 사방의 벽에 갇혀 있는 존재다. 그나마 주변 몇몇 사람의 입을 통해 자신을 본다. 하지만 그렇게 보는 자신은 자신이 아니다.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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