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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애사심 갖자는 얘기 좀 하지 맙시다

  • 2014.09.02(화) 08:31

강원국의 '직장인의 말하기·글쓰기'(22)
금기(禁忌)에 도전하는 재미

오늘도 회장에게 불려갔다. 그룹 신입사원 교육에서 ‘애사심을 갖지 마라’고 한 발언이 문제였다.

“자네 그게 무슨 소리야?”

회장의 호통이 이어졌다.

“자네, 애사심 의미를 알기나 해? 회사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거야. 회사와 같은 방향을 보는 거란 말이야. 그게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돼. 그게 있어야 기업이 지속 가능할 수 있어. 단합, 책임감, 충성심 이 모든 것의 밑바탕이기도 하고. 그런 애사심을 갖지 말라니, 당신 제정신이야?”

나 제정신 맞다. 낙인이론(labelling theory)이란 것이 있다. 규범을 근거로 누군가를 일탈자로 규정하여 낙인찍음으로써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현상을 말한다.

회사 안에서도 이런 낙인찍기가 횡행한다. 끊임없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게 바로 그것이다. 회사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즉 애사심에 관한 질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곧장 낙인이 찍힌다. ‘저 친군 애사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라고. 

대놓고 물어봐주기라도 하면 고맙다. 보통은 직접적으로 묻지 않는다. 교묘하게 물어본다. 예를 들면, ‘회사가 먼저냐, 가정이 먼저냐?’ 회장이 좋아, 아내가 좋아 하는 식이다. 둘 다라고 할 수도 없고. 이 뿐만이 아니다. 갑자기 부서 회식 잡아놓고 ‘오늘 회식 참석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참석하면 애사심이 있는 것이고, 선약이 있어 불참하면 애사심이 없는 것이다.

계열사 상품을 팔아주는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 자기 일 제쳐놓고 거기에 몰두하면 애사심이 있는 것이고, 자기 일 열심히 하면 애사심 없는 것이다. 계열사 상품 팔아주기가 엄연한 편법이지만 회장님 관심사여서 그렇다.

강요된 애사심은 세 가지 폐단을 낳는다.

첫째, 무능하고 나태한 사람의 방패 역할을 한다.

‘나만큼 애사심 강한 사람 없다.’는 것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감춘다. 어쩌면 자기도 모를 것이다. 그 말 뒤에 자신이 숨어 있다는 걸. 애사심의 갑옷으로 무장한 상사는 아래 직원에게도 애사심 잣대를 들이댄다. ‘당신은 능력도 있고 다 좋은 데 애사심이 부족해. 그게 문제야.’ 마치 무오류의 심판관처럼.  

둘째, 소모적 다툼만 일으킨다.

기업은 실질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추상적인 정체성 싸움 하는 데가 아니다. 사상 검증하는 곳은 더더욱 아니다. 회사를 사랑하는지 여부를 두고 얘기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 회사를 사랑하는 직원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직원은 악이라는 뻔한 결론만 있을 뿐이다. 회사를 사랑하는 방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것이 생산적이다. 애사심으로 무장한 직원들만이 가득한 회사를 상상해보라. 획일화된 목소리에 찬양 일색일 가능성이 크다.

 

셋째, 회사 잘못을 눈감아 주는데 쓰인다.

비리와 탈법도 ‘이 모두가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는 애사심으로 화장하면 통과된다. 애사심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그렇다는 얘기다. 나아가 애사심은 변화와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 ‘내가 어떻게 해서 만든 회사인데’라는 말 앞에서 새롭고 다양한 생각은 설 땅이 없다. 

 

과거에 애사심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주술로써 큰 힘을 발휘했다. 회장도 군사부일체의 끝자락 정도는 차지했다. 하지만 이젠 먹히지 않는다. 회사는 먹을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회장은 더 이상 너그러운 존재가 아니다. 

애사심보다는 소속감이 필요하다.
‘나는 왜 이 회사에 다니는가?’ 스스로 묻고 답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업의 핵심가치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깃발이다. 액자 속에 넣어두는 것은 의미 없다. 직원들이 그렇게 느껴야 한다.

 

말길을 열어 끼어들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투명하게 공개하고 참여시켜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조직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잘나가는 사람은 신경 쓸 것 없다. 소외돼 있는 사람을 끼워줘야 한다. 포퓰리즘이 아니다. 버리지 않을 거면 챙기는 게 맞고, 모든 문제는 이를 소홀히 하는 데서 생기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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