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Inside Story]헤르메스로 본 엘리엇...먹튀의 그림자

  • 2015.06.12(금) 07:57

#2004년 3월6일, 삼성물산에 대한 '주식등의 대량보유상황보고서' 공시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창에 떴습니다. 영국계 헤지펀드인 헤르메스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가 2개의 펀드를 통해 이틀 전 삼성물산 지분 5%(777만2000주)를 취득했다고 밝히는 내용이었죠.

 

애초 매입 목적은 '단순투자'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삼성물산의 단일 최대주주였던 삼성생명(4.8%)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한 헤르메스는 경영 간섭을 시작했습니다. 헤르메스는 급기야 삼성물산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까지 거론하다가 같은 해 12월 300억원 이상의 차익을 챙기고 발을 뺐습니다.

 

#2015년 6월4일, 다시 삼성물산 '주식등의 대량보유상황보고서' 공시가 떴습니다. 지분 7.12%를 샀다고 밝힌 매수인은 엘리엇 어소시에이츠라는 미국의 헤지펀드. 목적은 단순 투자가 아닌 '경영참여'였습니다.

 

이 펀드를 포함해 29조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제일모직의 삼성물산 합병 계획안은 삼성물산의 가치를 상당히 과소평가했다"며 지난달 26일 발표한 두 회사의 합병 계획에 어깃장을 놓고 있습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치려는 삼성그룹의 계획이 암초를 만났습니다. 사업 재편과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목적을 가진 경영 결정에 변수가 생긴 것이죠.

 

하지만 일종의 '평행이론'이랄까요? 11년이라는 시간을 돌려보면 삼성물산에 대한 두 외국 펀드의 움직임은 상당히 닮아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과거 헤르메스 사례를 짚어보면 이번 엘리엇 파문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습니다.

 

 

11년전 삼성물산 지분 5%를 인수한 헤르메스는 영국의 최대 연기금펀드이자 기업지배구조펀드를 표방한 자본이었습니다. 표면상 삼성물산 지분 취득 목적을 '단순 투자'라고 했지만 당시 삼성이 즉각 긴장했던 게 이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헤르메스는 공시 후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삼성물산에 갖가지 경영상 의견을 전달합니다. 3조3000억원어치에 해당하는 삼성전자 지분(3.4%)를 팔고, 삼성카드의 증자에는 참여하지 말 것이며 삼성물산 우선주를 매입해 소각할 것 등을 제안한 겁니다.

 

당시 삼성물산은 "전자 주식은 당신들 말대로 무수익 자산이 아니라 이걸 보유하고 있음으로써 원재료 납품이나 건설공사 수주 등에 큰 혜택이 있다, 또 삼성카드 증자는 주주가치에 최대한 부합하는 쪽으로 결정할 거고 우선주 매입소각은 지금은 아니다"라고 응수합니다.

 

외부로는 "이런 해외투자자들의 문의는 통상적인 것"이라며 내부적 긴장을 감추기도 했습니다만, 그 다음달 열린 이사회에서는 헤르메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삼성카드 증자에 불참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헤르메스는 이미 국내 기업들 사이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펀드였습니다. 헤르메스는 1999년 4월 대우증권 지분 5%를 취득하면서 국내에 처음 얼굴을 내민 뒤 한솔제지(8.64%), 현대산업개발(12%), LG산전(7.04%) 등 재벌 계열사이면서 지배구조상 문제점이 노출된 회사 주식을 샀고 한 해 전에는 한솔제지 이사회에 우선주 전량(86만주)의 유상소각을 요구해 관철시킨 전력도 있었습니다.

 

초기만 해도 삼성물산은 "헤르메스가 전통있는 연기금 펀드인 만큼 SK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소버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삼성물산이 '제2의 SK'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증권가를 휘덮었습다. 그해 6월 증권연구원을 비롯해 다수 증권사들은 삼성물산이 경영권 방어에 취약한 상황임을 경고했는데요.

 

당시 대우증권은 "연초 20%대였던 외국인 지분율이 46%대에 이르러 이미 경영권 방어에 위협적인 수준이고 호주계 플래티넘이 5.83%, 영국계 헤르메스와 베일리 깃포드가 각각 5%, 4.99% 등 범영국계 펀드 지분만 15.82%"라는 것을 근거로 "이는 대주주 지분율 13%보다 높기 때문에 이들이 언제든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고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보고서를 냈습니다.

 

▲ 2004년 6월 당시 대우증권 박영완 애널리스트가 제시한 삼성물산의 지분구조(자료: 대우증권)

 

양측의 충돌은 점점 가시화됐습니다. 조만간 열릴 주주총회에서의 위임장 대결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었습니다. 결국 삼성도 경영권을 보호하는 행보에 나섰습니다. 이러다 자칫 SK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걱정이 커졌던 겁니다.

 

같은 해 9월 삼성생명에 이어 계열사중 두번째로 많은 삼성물산 주식을 가지고 있던 삼성SDI가 700억원을 출자해 지분율을 종전 4.52%에서 3%포인트 가량 늘리기로 했고, 이어 11월에는 삼성물산이 자체적으로 600억원 어치의 자사주 매입 결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지분을 확충하는 전쟁을 시작한 거죠.

 

지금은 삼성물산 상사부문 대표이사(사장)인 김신 당시 상무는 그해 10월 "헤르메스가 (삼성물산도) 향후 1~2년 내에 적대적 M&A를 목표로 한 소버린 같은 펀드의 공격을 당할 수 있다고 했다. 현 시점에서 지배구조 등을 개선하지 않으면 향후 자신들도 이 같은 펀드를 밀어줄 수 있다고 말했었다"며 강한 경계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클라이막스는 그해 연말이었습니다. 한 일간지에 헤르메스 이머징마켓 총괄운용책임자가 "삼성물산 경영진이 주주의 이익보다 삼성그룹이나 그 창업일가의 이익을 우선할 경우 삼성물산의 인수를 노리는 펀드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인터뷰가 실린 겁니다.

 

이를 본 주식시장은 삼성물산에 대한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바로 이튿날 헤르메스는 보유지분 5%, 777만주를 한꺼번에 전량처분해 버립니다.

 

그러자 시장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M&A 이슈를 소재 삼아 상승세를 탔던 삼성물산 주식은 순식간에 고꾸라졌습니다. 시장에서는 헤르메스가 주가조작으로 부당이익을 챙긴 '먹튀'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헤르메스는 투자를 시작한 2003년 11월 이후 꼭 1년만에 투자원금 850억원의 50%인 380억원을 먹고 사라진 겁니다.

 

삼성물산의 한 관계자는 당시 일에 대해 "외국 자본에 의해 물산 뿐 아니라 그룹 계열사의 엄청난 경영 자원이 낭비된 사건이었다"며 "더 큰 피해는 주가 변동성이 커지면서 소액주주들이 투자손실을 보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다시 2015년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엘리엇은 과연 어떤 성격의 펀드일까요?

 

▲ 폴 싱어 엘리엇 매니지먼트 회장
 

1977년 폴 싱어 회장이 설립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14.6%의 연 평균 수익률을 내고 있는 헤지펀드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주주가치 증대와 도덕적인 기업지배구조를 바탕으로 모든 주주들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적극적인 투자자(Activist)"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성물산 주식 매입 이후에도 늘 덧붙이는 말이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수사(修辭)입니다. 펀드의 근본적 속성은 '수익률 확보'지만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주주들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활동하고 있다는 게 이 펀드의 모토입니다.

 

지금의 삼성물산이 2004년의 삼성물산과 다른 점은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결의한 상황이라는 겁니다. 삼성그룹은 이 합병이 사업적 시너지 창출에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외부에서는 그룹의 3세 승계라는 지배구조와 연결된 포석이라는 시각이 많습니다.

 

엘리엇이 치고 들어온 부분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자신이 지분을 보유한 삼성물산이 대주주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보다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돼 합병이 이뤄졌다는 거죠. 이렇게 되면 엘리엇뿐 아니라 다른 삼성물산의 주주들도 손해를 입는다는 주장입니다.

 

▲ 삼성물산 지분구조. 삼성물산은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 5.79%를 지난 10일 KCC에 매각했다. (자료: 한국투자증권)

 

앞으로는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질까요?

 

우선 헤르메스처럼 차익만 먹고 빠질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단기간 거둔 평가차익을 현실화해 빠져나간다면 '먹튀' 논란이 거세질 수 있습니다. 이경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2004년 헤르메스와 비슷할 수 있지만 엘리엇의 과거 투자 행태를 보면 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하네요.

 

현재의 지분율을 유지한다면 다른 세력과 연대해 합병시 매수청구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매수청구권 한도 금액인 1조5000억원(지분 약 17%)을 넘길 경우 합병 해제가 가능하다는 조건이 달려 있는데 이를 이용해 일단 합병을 무산시키겠다는 것이죠. 차익 확보는 그 이후가 될 겁니다.

 

엘리엇이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삼성물산의 지분을 추가 매입하고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지분율 10% 이상일 경우 '회사 해산청구권'과 '정리개시 청구권' 등의 권한을 갖는 주요 주주가 되기 때문이죠. 29조원에 달한다는 엘리엇의 자금력과 삼성물산의 향후 삼성전자 지배력까지 감안하면 이 시나리오 역시 개연성이 있어 보입니다.

 

삼성물산은 엘리엇이 과거 헤르메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엘리엇이 물산을 더 경쟁력 있는 회사로 키우겠다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결국 단기 차익을 목적으로 한 헤지펀드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엇은 2001년 아르헨티나라는 한 국가를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게한 전력을 가진 강력한 펀드입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실패하면 이후 진행할 모든 지배구조 개편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습니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런 조언을 하네요. "삼성 입장에서는 지금부터라도 기존 주주의 절대적인 지지를 모을 때다. 기업의 가치와 주주의 가치가 같은 선상에 있음을 설명하고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주주친화정책을 통해 적극적인 설득에 나서야 시련을 피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naver daum
SNS 로그인
naver
facebook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