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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떨고 있니'…바짝 움츠러든 대기업들

  • 2017.06.19(월) 19:08

공정위장 "기대 어긋나면 적절한 조치"…대기업 내부거래 주목
한진·CJ, 일감 몰아주기 회사 정리…재계, 규제대상 확대 '촉각'

#직원 20여명을 둔 판촉물 판매회사인 A사는 개당 1만원짜리 기념품을 대기업인 B사에 1만1000원에 납품했다. 3년간 이 가격에 판촉물을 대던 A는 그사이 회사 전체 인건비가 50% 가까이 늘었다며 B사에 납품가를 올려주길 희망했다. B사는 A사로부터 남품받는 금액이 크지 않고 이미 몇몇 협력사의 비슷한 어려움을 들어준 전례가 있던 터라 A사의 요구를 흔쾌히 들어줬다.

 

평소 같으면 '을(乙)의 눈물'을 닦아준 훈훈한 사례였겠지만 공정거래위원회의 눈은 달랐다. A사의 주주구성을 보니 주주들이 모두 B사 회장의 자녀들이었다. 공정위는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로 보고 A사와 B사 모두에게 시정조치와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가 45개 대기업집단의 내부거래 실태점검에 나선 것으로 알려지면서 재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김상조 위원장은 19일 "재벌개혁을 몰아치듯이 진행하지는 않겠다"면서도 경고의 메시지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정부의 바람이나 사회적 기대에 어긋나는 모습을 반복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때는 공정위를 비롯해 행정부가 가진 수단을 통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대에 어긋나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총수일가의 개인회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행위가 꼽힌다. 김 위원장은 "지난 3월부터 대규모 기업집단의 내부거래 실태를 점검하고 있다"며 "지금 분석 중에 있다"고 했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대기업(자산 10조원 이상) 총수일가의 지분 30% 이상인 상장사(비상장사는 20%)가 다른 계열사와 턱없이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거나 사업기회를 누리는 것 등을 금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연간 거래총액이 200억원 이상 ▲총매출의 12% 이상 ▲정상가격보다 7% 이상 유리한 조건이면 처벌대상에 오를 수 있다. 특히 일감 몰아주기는 지원주체뿐 아니라 지원받는 회사를 같이 제재한다. 일감 몰아주기를 지시하거나 관여한 총수일가도 처벌한다. 위반시 '3년 이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 벌금'으로 불공정거래행위(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5000만원 이하 벌금)보다 처벌규정이 무겁다.

앞서 A와 B사 사례는 한진그룹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조원태·현아·현민 3남매가 지분 100%를 들고 있던 싸이버스카이(A사)는 판촉물 고가거래와 통신판매수수료 면제 등의 특혜를 받아 지난해 11월 공정위로부터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1억300만원을 부과받았다. 싸이버스카이 연간 순이익(평균)이 5억원 안팎임을 감안하면 가볍지 않은 처벌이다.

특히 대한항공(B사)은 콜센터회사인 유니컨버스와 거래에서도 법위반이 적발돼 조원태 사장이 형사고발됐다. 유니컨버스 역시 총수일가가 지분 100%를 보유한 회사다. 공정위의 조사대상이 되기 전 이 회사의 순이익은 연간 10억원 정도였다. 벌어들인 돈을 모두 주주에게 배당한다고 가정해도 매년 10억원밖에 거머쥐지 못하는 회사 때문에 오너 일가가 형사처벌될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최근 조 사장이 대한항공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 대표에서 물러나고 유니컨버스에 대한 총수일가의 지분을 전량 대한항공에 무상증여키로 한 것도 더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 저촉돼서는 곤란하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한진그룹은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의혹 등 일각에서 제기된 일부 오해들을 불식시키는 한편, 준법경영 강화를 토대로 투명한 경영 체제를 갖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일감 몰아주기로 제재를 받은 곳은 현대그룹과 한진그룹 2곳에 불과하다. 지난해 CJ CGV가 받은 제재는 계열사 부당지원행위 때문이지 총수일가의 사익편취와 관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정위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기업들의 중압감은 컸다.

실제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의 동생인 재환 씨가 지분 100%를 보유한 재산커뮤니케이션즈가 일감 몰아주기로 주목을 받자 지난해 이 회사를 CJ올리브네트웍스의 100% 자회사로 만들었다. 현행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총수 일가의 지분이 일정 비율(상장사 30%, 비상장사 20%) 이상일 때만 적용된다는 점을 노려 지배구조를 바꾼 것이다.

 

CJ그룹은 재산커뮤니케이션즈와 케이블방송 송출대행 계열사인 CJ파워캐스트를 합병한 뒤 CJ올리브네트웍스와 주식을 교환하는 복잡한 방식을 동원해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서 벗어났다.

문제는 지배구조 변경이 쉽지 않은 계열사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새 정부에서 총수일가 지분 요건을 30%(상장사)에서 20%로 낮추고 총수 일가가 계열사를 통해 간접지배하는 곳까지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포함하면 그 파장이 만만치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예를 들어 총수일가의 지분율 20% 이상으로 적용대상을 확대하면 현대글로비스 등이 일감 몰아주기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 등 총수일가가 지분 29.9%를 보유해 규제대상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있는 상태다.

 

한화에너지의 경우 현재 한화S&C가 지분 100%를 보유해 규제대상이 아니지만 총수일가의 간접지배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일감 몰아주기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 한화S&C는 김승현 회장의 세아들이 지분 100%를 보유한 회사다. IT 회사라는 특수성 때문에 가뜩이나 내부 일감이 많은데 그 계열사인 한화에너지도 한화케미칼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대기업들은 말그대로 정중동이다. 새 정부 취임초라 대놓고 불만을 나타내진 않지만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니냐"며 못마땅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쪽에선 일감몰아주기에 저촉되지 않도록 내부경보를 강화하는 모습도 감지된다. 업무처리 과정에서 거래금액이 작다고 무심코 넘겼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최근 SK와 롯데, 한화 등 주요그룹은 임직원 대상의 공정거래 관련 특강을 열고 문제될 만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교육을 실시했다. ㈜한화 관계자는 "준법경영과 기업윤리가 강조되는 분위기를 감안해 전사 차원의 교육을 진행키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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